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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가고 싶을 때

11월의 단상 # 1

지난 달은 정말 바빴다. 특별하게 하는 일이 있어서가 아님에도,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회사에서 잘 안풀리면 생각을 집까지 가져와서 그런지, 기억에 남은 건 출퇴근의 반복이었고, 그 와중에 간간히 주말이 가끔 생동감을 주입시켜주는 느낌이었다. 그 중에도 소중한 사람들의 생일은 다가와서, 비록 멀리 있지만, 연락으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고요하고 무정한 날들을 보내다 새벽에 터진 이태원 사건은 나에게 깊은 충격을 줬다. 운이 좋아서 살았고, 운이 나빠서 죽었다고 단편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애초에 아둥바둥 열심히 사는 게 꼭 삶과 보상을 의미하지 않음을 다시금 느꼈다. 나는 선하고 열심히 살아서 목숨을 건졌나? 반대로, 저 사람들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봤을 때 평균적으로 악해서 죽었나? 인명에는 정량이 없다. 매체를 통해 인류애가 박살나는 광경도 많이 봤지만, 결국 누군가를 욕해서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현상을 다면적으로 보지 않으려 함과 같다.  인류의 류자는 무리를 이룬다는 뜻이지만,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사람은 그냥 흘러갈 수 밖에 없는 존재다.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체력이 없는 의지는 그저 메아리에 불과한 편에 가깝다. 결국 흐르는 대로 가장자리에 부딪히지 않는 정도로 사는 것이 인생을 구덩이에 쳐박지 않는 꿀팁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다.
인생에는 아름다운 게 얼마나 많은데 넌 왜 이렇게 비관적이니?

 

비관주의자로 보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현실의 기본값은 고통이다.  인간은 자주 아프고, 상처입고, 고장난다. 또한 먹고 살아야하니, 정신과 육체를 갈아넣고 생활을 영위한다. 그래서 인간 자체는 매우 연약하고, 늘 시련이 뒤따른다. 이런 고통 자체를 삶에서 지울 수는 없다. 유한한듯 무한한 삶은 쳇바퀴가 멈추기 전까지 크고 작은 고통을 지속적으로 주입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고통을 해소하고자, 만족감으로 지워낸다. 맛있는 음식, 호캉스, 게임, 담배, 기타 모든 만족감을 주는 활동은 모두 고통을 경감하기 위한 행동이다. 극단에 마약을 하든, 도박을 하던, 그것들은 불만족 내지는 결핍이라는 것을 희석하고자 하는 행동이고, 희석시킨다는 것은 모두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그것을 잊고 싶다는 감상적인 동기가 내재되어 있는 행동이다.

 

평소보다 유독 염세주의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을 늘어놓은 것 같지만 사실 나는 삶은 고통스럽기에 결과에서 자유로워야 함을 말하고 싶다. 결과로써 삶의 성패를 비교하는 것이 메인스트림이 된다면(이미 그렇지만) 누구도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오히려 경험과 노력을 통해 얻어낸 것이 결과가 아닌 자아를 단단하고 깊게 만들어주는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면 한다.

 

그래서 정말로 귀중한 것은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이다.  생각한만큼 삶이 행복하지 않고, 고되고 , 결과가 기대를 따라주지 못할 때, 보상이 원만하지 않을 때, 얻으려 했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상기했을 때, 에고는 더욱 단단해진다. 나는 스스로 결핍을 해소하는 방법을 떠올렸을 때 조금은 마음이 편해질 수 있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슬픈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달리기에 집중하면, 내 안의 결과만을 중시하는 태도가 조금은 덜어질 수 있었다. 나는 밖에서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목매는 사람처럼 보여지고 행동했는데, 사실은 무척이나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그걸 깨달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이렇게 하나씩 결과에 집착하는 것를 덜어내고 있다.

 

이야기는 무척 돌아온 것 같지만, 이태원에서 벌어진 일은 당연히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하는 일이다. 이와는 별개로, 현상이 주는 교훈이 범인을 찾고 마녀사냥을 해서, 마음 속의 무게가 덜어지는 것에서 불편함이 끝난다 해도 결과는 변함이 없기에. 개인적으로 의미를 새겨둘 수 있게 나에게는 이 불편함이 오래 남았으면 한다.